인공지능 시대 대학 글쓰기
서구의 전통에서 수사학은 철학과 함께 자유학예교육(liberal art education)의 주요한 두 축을 이룬다.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은 이러한 수사학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화와 설득을 중시한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의 민주주의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은 민주주의 이념의 실현과 확대라는 목적에서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설명과 논증, 학술적 글쓰기를 위주로 하는 대학 글쓰기는 합리적 의사 소통을 목표로 하며, 이는 대학사회와 그 너머 일반 시민사회의 맥락을 아우른다.
합리적 보편담화 교육을 지향하는 대학 글쓰기에서는 쓰기뿐 아니라 읽기도 중요하다. 타인의 글을 활용하고 종합하는 과정은 대학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적 글쓰기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대학 글쓰기의 목적은 대학생들이 재학 중 또는 졸업 후에 대학과 사회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공적 글쓰기의 방법을 익히게 하는 것인데, 이러한 공적 글쓰기에서는 저자의 기존지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타인의 저술을 이해하고 종합하는 것이 필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쓰기뿐 아니라 읽기와 관련한 내용도 자세히 다룬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글을 이해하고 비판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앎과 의견을 생성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의사소통의 내용과 형식 일체를 AI에 맡겨둔 채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과 표현하는 능력 모두가 퇴화하고 있는 오늘날 글쓰기 교육에서 읽기 교육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AI에서 손쉽게 답을 찾으려 하는 요즈음 인간의 사고력은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따라서 능동적 읽기 교육을 통해 사고력을 계발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찾게 하는 것으로부터 글쓰기 학습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제에 대해 이해하고 사고하며 표현하는 제반 과정을 훈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인공지능 글쓰기에서 빈발하는 거짓 정보 및 편향적 사고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비판적 읽기 교육은 중요하다. 거짓 정보의 제시는 인공지능의 환각(hallucination) 현상 때문에 빈번히 발생한다.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존재하지 않는 책을 참고도서로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또 어떠한 윤리적 기준 없이 방대한 자료를 활용하는 인공지능의 특성상 사상적 편향성을 띠고 윤리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내용 또한 여과 없이 제시한다는 문제도 흔히 제기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실을 검증하고 전제를 의심하는 비판적 읽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읽기 교육의 강화와 함께 생성형 AI 시대 글쓰기의 의미와 방법을 재고하고 재정립하는 것도 시급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읽고 쓰는 능력은 현재도 놀라울 정도고 앞으로 더욱 발전하겠지만, 이것이 잘하지 못하는 점, 취약한 점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생성형 인공지능의 쓰기와 읽기가 지니는 한계를 알고 글쓰기의 보조도구로서 AI를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 같은 글쓰기 환경의 변화와 주의사항에 대해 서두에서 상술하고, 이어 계획하기와 집필하기, 고쳐쓰기의 각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생성형 AI 활용의 의미와 유의사항을 검토한다.
혹자는 이제 중요한 것은 쓰는 것이 아니라 고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AI에 초고를 맡겨두는 행위는 다분히 위험하다. 특히 글쓰기 실력을 아직 더 연마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이 쓴 초고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수정해 나가려면 글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데, 이러한 식견은 무엇보다 글쓰기 행위 자체를 통해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고를 AI에 맡겨두고 글쓰기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눈을 기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AI 덕분에 스스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AI를 감독하고 글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글쓰기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글쓰기 훈련이 필요한 이 같은 상황을 글쓰기와 관련한 AI의 역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AI 시대의 문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역설을 인지하고 전통적 글쓰기 훈련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전통적 글쓰기의 과정과 방법을 충실히 서술하되, AI 관련 사항 또한 글쓰기의 각 단계별로 첨언한다.
공동체와 시민성, 대화를 중시하는 대학의 교육적 신념이 지속되는 한 합리적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글쓰기 교육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사고와 표현 일체를 AI에 빌려 쓰는 것을 능사로 아는 현시대에 이 점은 더욱 되새길 필요가 있다. AI에 빚지는 인지의 부채가 어느덧 인지의 파산 수준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더 깊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연습을 이 책과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