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학,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여행자
제1장. 尹東柱 詩學 一般
尹東柱(1917~1945)는, 朝鮮人으로서 滿洲에서 태어나, 日本人의 땅에서 죽어간 詩人流配者이다.
詩人 尹東柱의 詩學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인간존재의 超然한 노래이다.
여기서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
기독교에서 하늘은 응당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太初에 최초로 發話된 말씀이다. 그 말씀으로서 하늘을 우러르는 자가 곧 ‘예수’다.
老子에게 하늘은 天地自然으로서 道다. 그런데 道可道非常道의 道이므로 서술된 언어로써는 묘사될 수 없고, 묘사되어서도 안 되는 하늘이다. 만약 언어로써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늘 그러한 본래의 道일 수 없는 탓이다. 그래서 道는 詩로서만 노래될 수 있다.
孔子의 말씀은, 學而時習之不亦說乎로써 시작된다. 이는, 배움과 연습으로써 하늘의 말씀을 체득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늘의 말씀(仁)’을 체득한 자가 곧 ‘聖人’이다.
부처는 出生 후, 최초의 發話로써 天上天下唯我獨尊을 말씀했다. 홀로 선 自我가 곧 하늘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천지자연의 원리로서 道로써 말씀된 하늘인 존재, 그가 바로 詩人이다.
윤동주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지속된 流浪이었으며, 암울한 流配였다. 朝鮮, 滿洲, 日本, 그 어디에도 그의 故鄕으로서 조국은 不在하다. 그러한 故鄕(祖國)의 不在는, 그의 삶을 流配의 流浪으로써 點綴케 했다.
그래서 윤동주의 삶 자체는 비극이다. 그것은 한 인간존재로서는 不得已한 不條理였다. 조국이 日帝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현실을, 문학적 감성이 多分한 一介 인간존재가 어찌 하겠는가.
결국 윤동주는, 梅泉 黃玹처럼 義憤을 떨치며 자살할 수도 없었고, 勉菴 崔益鉉처럼 의병투쟁을 할 수도 없었고, 安重根처럼 敵의 首魁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詩人으로서, 담담히 자기의 詩를 지어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인지 윤동주의 경우처럼, 역사 안의 시인들은 대체로 비극적 존재들이다. 詩라는 것이 喜怒哀樂의 여러 감정을 노래하지만, 아무래도 분노와 슬픔을 위주로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야만 하고, 그러한 정서를 담아낼 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억지스럽게 비극적이고자 한다고 해서 悲劇性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윤동주 이후, 한국전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등의 상황에서 많은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그 시대적 상황의 비극성이 자연스레 시인의 비극성을 북돋았던 탓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經濟大國이 되고 민주화된 이후에는, 이렇다 할 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토록 갈구하던 고도의 산업화와 성숙된 자본주의를 실현한 시절이어서, 하물며 著名했던 어느 시인은, 지난날의 性醜聞이 온 세상에 까발려지며 역사에서 삭제되어버리기도 한다.
애당초 인류문명에 있어, 시인은 비극적 존재이고, 시는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다. 물론 비극 이외의 어떤 테마라도 詩로써 노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詩들은 결국엔 시나브로 시들어버린다. 시를 읽으면서 굳이 기쁨, 즐거움, 幸福, 敬歎, 歡喜, 福樂 따위의 분위기를 목적하는 독자가 稀少한 까닭이다.
어느 著名한 喜劇俳優의 넋두리처럼, 인간존재의 삶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죄다 비극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러한 天地自然의 理致를 體得했던 부처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존재의 삶을 ‘一切皆苦의 派瀾苦海’라고 규정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悲劇的 流浪의 詩人 윤동주의 詩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유력하게 기억되고 愛誦되는 까닭이다. 어쨌거나 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안든, 비극적 존재이고, 고독한 유랑자이기 마련이다. 비극적 상황에 내던져짐으로써 시를 지어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지어낸 시이므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음이다.
혹자는 윤동주의 詩學을, 아주 순수한 敍情主義나 宗敎主義에 입각하여 감상하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학은 애당초 본래적으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時空間的 상황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표면적으로 어떠한 描寫를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비극의 토대 위에서 작동할 따름이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윤동주와 같은 시인이 재현될 수 없음을 傍證하기도 한다.
물론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유토피아의 실현일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사회의 형편에 비추어볼 때, 당최 비극적일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남북한이 분단되었다지만, 남한의 경제수준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수준에 있고, 한국전쟁 이후 어떠한 형태로든 평화적 休戰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절은 현실세계가 욕망과 충족으로써 작동할 따름이다. 그러니 頹廢的이거나 絶望的일망정 당최 悲劇的일 수 없다.
예컨대,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시뮬라크르, 히키코모리, 이지메, 판타지, 섹슈얼리티, 하드코어 따위가 그러하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悲劇도 喜劇도 아닌 不條理劇과 解體劇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제아무리 비극성을 담아내려고 해도, 근원적인 恨에 이르지 못하고, 기껏 個人主義的인 鬱憤이나 憂鬱의 차원에 머물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동주의 시절처럼,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된다거나, 전쟁이 勃發해야 한다거나, 경제적으로 沒落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그저 당분간은, 윤동주와 같은 詩人을 만날 수 없음을 是認해야만 한다.
필자는 時限附의 삶을 예정받았다. 그런 탓에 尹東柱詩學을 지어내는 時空間이 온통 조급함으로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당최 서두를 수 없는 노릇이다. 서두른다고 채워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담담히 시간 안에 내버려 둘 따름이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