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

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

저자
탁양현 저
출판사
e퍼플
출판일
2018-10-19
등록일
2019-06-21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19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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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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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경제적 欲望無意識’과 ‘정치적 集團無意識’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어떻게든 나름대로 意識的(理性的)인 존재인 양 살아내고자 하지만, 결국 철저히 無意識에 의해 작동하는 무의식적 존재임에 대해서 記述코자 한다. 그러한 모티브는, 필자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起因한다. 필자는 몇해 전, ‘鬪人 동물농장’이라는 곳에서, 雜役夫 노릇으로써, 수 개월 동안 糊口했다. 그러면서 사회의 최하층에게 가해지는, 실로 잔혹한 ‘갑질’을 여실히 체험했다.
그런데 그것은 非但 어느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農場의 構成員 전체가, 핏발선 흡혈귀처럼, 어떤 대상이 자기보다 한치라도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집단적으로 온갖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類의 것이었다. 그래서 ‘터’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하는 모양이다. 당시에는 그 ‘동물농장의 터’가, 그런 ‘짐승 같은 자’들만 꼬여드는 시공간으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회상해 보아도, 그 ‘동물농장’에 모여사는 ‘동물’들은, 죄다 하나 같이 참으로 빈곤하고 저급한 족속들이었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최저임금도 되지 못하는 급여를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公心을 갖고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가혹한 ‘갑질’이었다. 그러니 ‘거지가 거지 꼴 못본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1-804’의 狂氣어린 ‘갑질’이었다. 폐기물 비용을 납부하라는 메모를, 현관문에 붙여 둔 일을 빌미로, 마치 ‘미친 개’처럼, 온 동네가 떠나갈 듯, 거품을 물고 짖어대며, 위세를 떨던 그 눈빛이, 당시 필자로서는 당최 ‘짐승’의 것으로도 뵈지 않았다. 더욱이 그러한 사태를 관망하며, 야비한 표정을 짓던 ‘동물농장’ 구성원들 전체의 눈빛 또한 그러했다.
이후, 그 사건은 지속적인 trauma가 되어서, 여전히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당시 필자는, 단지 자기들의 ‘동물농장’에 고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든지 ‘갑질’을 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동물’들의 집단적인 사유방식이, 참으로 기괴했으며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동물존재’는 그런 천박하고 유치한 차원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일까.
그저 간혹 뉴스에서나 접하던 일을, 필자가 직접 당하고 보니, 그 弊害는 당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그 사건은, 저급한 ‘동물농장’에서 천박한 ‘짐승’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과거에 필자는, 대한민국 최상층의 學閥을 지녔다는 교수, 강사, 박사, 석사 따위가 모여 있다는 곳에서도, 유사한 ‘갑질’을 체험했었다.
하긴 大統領까지도 集團無意識의 搖動으로써 이내 ‘갑질(탄핵)’당하는 세상이니, 그런 류의 ‘갑질’은 크게 문제될 것 없는지 모른다. 다만 필자로서는 인상적인 지점이, 그러한 일련의 作態들에 공통하는 것은, 그 정치적(사회적) 決定의 正當性이나 正統性이, 지극히 恣意的이고 集團的인 무의식에 根幹을 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필자는, 그러한 ‘갑질’의 토대가 무의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특히 集團無意識으로써 작동한다는, 오랜 窮究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에, 그 이론적 바탕을 論述하고, 논리적으로 검증하여, 좀 더 확장된 主張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현실세계에서 政治의 실제적인 목적은 권력의 簒奪이다. 原論的으로 정치는 인간세계를 보다 나은 상태로서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원리이지만, 실제적으로 인간존재에게 체감되는 정치는, 곧 政權의 向背이다. 인간존재가 이러한 정권은 목적하는 까닭은, 富와 權力과 名譽를 누리기 위함이다. 이런 것들을 좋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권은 무엇에 의해 작동하는가. 그것은 현대적 표현으로는 經濟力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東西를 막론하고서, 백성(국민)을 먹여 살라지 못하는 정권은 존속될 수 없다. 그렇게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경제력이다. 따라서 경제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러한 정권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경제력은 지극히 無意識的인 영역에 토대를 둔다. 대체로 경제활동은 다분히 意識的인 행위로서 인식한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결코 의식적인 활동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십상이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가장 기초적으로 衣食住에 있다.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집을 갖는다는 것이야말로, 경제활동의 始發點인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의식주에 욕망이 덧씌워지기 어려웠다. 財貨를 생산하는 역량이나 기술이, 그저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활동이 적극화되면서, 이제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더욱이 기술발전도 가속화되어, 더욱 많은 ‘所有的 欲望’을 부추기게 된다.

본래 욕망이란, 지극히 무의식적인 정신작용이다. 그래서 욕망을 제어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만약 자기의 욕망을 自由自在할 수 있다면, 그는 聖人君子나 賢者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대부분의 인간존재는, 철저히 욕망에 服務한다.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목적하며, 욕망에 지배당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간존재의 욕망이, 가장 절실하게 顯現되는 현장이, 바로 경제활동이 실현되는 市場이다. 그래서 시장이 발달할수록 인간존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하는 기술도 발전한다. 그러한 경제력이 정치권력에 가장 주요한 변수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정권은 죽는다’는 법칙이 규정될 수 있다.
다만,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서도, 정권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한이다. 그러할 때,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고통은 오롯이 백성의 몫이다. 그리고 정권은,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反動을 상쇄하기 위해, 아주 가혹한 정치를 실현케 된다. 이는, 역사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정치와 경제의 악순환’이다. 다만 그 고통의 몫일 따름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 현대에는 정권이 선거를 통해 移讓된다. 그런데 그 과정은 결코 의식적이지 않다. 그러다보니 당최 理性的으로 납득되지 않는 현상도 目睹하게 된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는,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을 지극히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전제하는 오류 탓이다.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의식적인 것으로 분별됨은, 그것이 인류문명의 高度한 지식으로써 포장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꾸만, 門外漢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문적인 이론과 논리로써 무장하고 있다. 그래야만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지극히 理性的이며 意識的인 것으로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철저히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작동하고, 그러한 경제활동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정치권력 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작동방식을 알지 못하면, 현실세계의 경제활동과 정치활동은, 올바르게 인식될 수 없다. 이에, 그 근원적인 법칙과 원리를 모색하였으며, 그 大綱을 제시한다.

대체로 ‘欲望(desire)’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분별할 때, 本能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나 ‘윌리엄 맥도갈’은, 食慾, 性慾, 群居, 模倣, 호기심, 鬪爭, 逃避 등을 본능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는 식욕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성욕을, ‘프리드리히 니체’나 ‘알프레트 아들러’는 권력욕을 근본으로 하여, 자신들의 학설을 만들었다.
현대의 심리학은 個體의 動因을, 단순히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생각하여, 기본적 욕구라고 본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진정한 욕구와 準욕구로 구분하였고, ‘제임스 프레스콧’이나 ‘게이츠’는, ‘생리적·생물적 욕구’와 ‘사회적·인격적 욕구’의 2가지로 크게 구별하였다.
‘생리적·생물적 욕구’는 식욕, 배설욕, 수면욕, 활동욕, 성욕 등이며, ‘사회적·인격적 욕구’는 사회적 認定의 욕구, 집단소속의 욕구, 애정의 욕구, 성취의 욕구 등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생리적 욕구를 기초로 하여,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自尊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 5가지 욕구가 계층적 구조를 형성한다고 설명하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분석하였는데, 라캉의 ‘욕망(desir)’은, 프로이트의 용어 ‘所望(Wunsch)’의 프랑스 번역어에 해당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표준판 번역본에서 ‘wish’로 번역되어 있다.
‘라캉’은,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를 따라서,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욕망은 ‘의식적 욕망’이 아니라, 항상 ‘무의식적 욕망’에 해당한다. 또한 이 ‘무의식적 욕망’은 완벽하게 性的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지나치게 ‘프로이트의 神話’에 傾倒되어버린 결과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욕망은 ‘무의식적 욕망’이며, 그것은 철저히 경제활동에서 發現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철학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前述했듯이,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정치권력은 죽기 때문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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