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글보다 더 보라빛스럽다
그림은 글보다 더 보라빛스럽다.
그림은 유치원생도 알아보고 즐긴다. 어른도 그림을 보고 '뭘까?'하며 순수한 호기심으로 다가가며 즐긴다. 그림은 잊혀진 것 같은 순수 그 자체의 물을 끌어올리는 동인이 된다.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꺼지지 않는 장면(그림같은 모습)을 보고, 80세 가까운 노인도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거기서 놀라운 만남을 갖게 된다. 야곱도 광야에서 홀로 눈물로 돌베개를 적실 때, 천사가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장면(그림같은 모습)을 보고 사다리 위의 분을 바라보게 된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도 그림같은 모습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말하지 않아도 눈물이 울컼하며 흐르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횃불같은 촛불을 들고 나아간 것이다.
글(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다가가는데 시간이 걸린다. 다가가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점검하게 된다. 극단적 단체의 댓글은 아닌지, 어용 지식인의 글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게 된다. 95%의 팩트를 말해도 5%의 왜곡된 의도를 품고 있으면 그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사실 그림에도 왜곡과 의도가 있다. 예를 들어, 시골 가로수 길에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가마솥 밥 내음이 아이들을 유혹하고 굴뚝 위의 연기가 손짓하며 부른다. 이런 풍요로운 장면을 화가가 그린다. 사실적 장면에 있는 전봇대와 여기저기 널부러진 전선은 화가의 손에 포토샵되어 있다. 심지어는 화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자신의 그림에, 말 궁둥이에 박힌 표식처럼 새겨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신뢰감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다. 굴뚝 색을 황토와 어우러진 노란색으로, 저녁노을을 오렌지색 감도는 주황으로,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하얀색과 버무려진 보라색으로 칠해도 우리는 푸른 풀밭의 싱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즐긴다. 그림 속에서 자신의 옛 추억과 관련된 하나의 소재만 발견 되어져도 아련한 옛 추억속에 잠긴다. 굳이 '핑크보라, 주황보라, 하이얀보라' 라고 말하지 않아도 각자 자신이 느끼는 보라빛 환상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은 글보다 더 보라빛스럽다.
그림은 사진보다 더 보라빛스럽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환등기로 펼쳐 보이며, 농어촌 어린이들에게 영화처럼 보여주었다. 사진으로 어린이들에게 비젼을 보여준 것이다.
찰칵하는 셔터소리, 좋은 구도를 잡기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자세, 사진 현상을 기다리는 마음들이 좋았다. 사진대회 출품해서 상도 받는 보너스도 있었다.
좋은 사진에 대한 생각과 시야가 새롭게 열려 나갔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사진, 흥미를 유발하는 사진이 좋다. 이러한 새로운 구도와 빛그림의 세계는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내었다.
좋은 사진을 찍어 나가는 과정은 마치 TV 광고 문구를 다듬어 나가듯이, 성우들이 발음과 억양 교정으로 좋은 소리를 만드는 과정과 같다. 내 개인적으로는 오솔길이나 담쟁이 넝쿨의 자연스러운 소재가 좋다. 또는 삶의 재발견을 통한 재해석이 좋다.
그렇게 발견한 한 장면을 요즘은 그림으로 그려나가며 사진으로 기록중이다. 사진은 백여 장 찍은 것 중 좋은 사진 몇 장만 건져도 잘한 것이다. 요리사가 새로운 요리를 출시하고 다양하게 다듬어 가다보면 작품같이 균형 잡힌 요리가 되어간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 주제의 다양한 그림을 그리다보면 작품이 되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의 긴장감과 순간의 충실감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이미지를 즐기며 그리는 그림이 더 보라빛스럽다.
이와같이 그림은 글보다, 사진보다 더 보라빛스럽다.
그림을 그리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은 내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마무리하다가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 때, 보라색으로 감싸고 흩뿌리면 어느 순간 편안함이 깃든다. 나의 그림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보라색인 것이다. 보라색의 중재적이며 환상적인 이미지가 마음에 와닿았기에, 나는 보라빛이 좋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각 당은 고유의 색을 배경으로 들고 나온다. 한국인은 어렸을 때부터 태극기를 무수히 보고 그려왔다. 흰색 바탕위에 빨강과 파랑이다. 주변에는 검은 눈썹이 그려져 있다.(건곤감리) 정치인은 빨강과 파랑을 강조하지만 빨강과 파랑이 만나면 보라가 된다. 색을 이해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다음에는 중재의 의미인 보라당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바탕색 흰색과 보라는 섞이면서 연보라가 된다.
빨강과 파랑이 만나는 보라색의 중재의 의미를 알기에 카톨릭 신부는 보라색 사제복을 입는다. 유럽의 성화에서는 예수님의 입으신 옷을 보라색으로 표현한다.
단절된 때에,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해야 할 때에, 중재의 의미를 아는 보랏빛 지도자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공정과 공평을 화두로 또다시 빨강과 파랑을 강조하며 찢겨지고 분쟁할 것이다. 이 때, 보라색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보라빛 세상이 오지 않을까? 보라빛 세상이 오려면 빨강도 필요하고 파랑도 필요하다. 빨강도 소중하고 파랑도 소중하다. 이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빨강과 파랑이 만날 때, 보랏빛 그림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림은 글보다, 사진보다 더 보라빛스럽다.